소작쟁의 발생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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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농민운동
소작쟁의 발생과 의의

소작쟁의 발생과 의의

으레 섬이라 하면 어업이 주된 산업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신안군 지역은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50%에 육박했으며, 무직자를 제외한다면 농업종사자 비율은 80~90%에 육박한다. 섬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주민이 농업에 종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주로 재배하는 농산물은 면화와 쌀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가지지 못했다. 토지 대부분은 일부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암태도 문재철, 지도 박종섭·하시모토[橋本瀨貞]·우치다[內田佑義], 도초도·자은도 문재철·나카지마 [中島靑太郞], 매화도 서인섭, 하의도 도쿠다[德田彌七]가 대표적이다. 농민들은 대지주의 밑에서 소작을 부치며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이 또한 가혹했다. 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 5할, 심지어 는 7~8할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그 외 잡다한 비용도 부과하면서 소작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매화도 청년들
매화도 민가
1920년대 초 농민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농민단체를 결성하고 소작료 4할을 요구하였으며,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신안군 지역에서도 1923년 12월경 암태소작인회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지도소작인공조회, 매화도노농공조회(이후 매화도소작인친목회 → 매화도농민조합), 자은소작인회, 지도소작인공조회(고이지회·사옥지회·선도지회), 비금소작인회, 도초소작인회, 안좌소작인 회, 하의농민조합 등이 결성되어 소작료 4할을 요구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암태소작쟁의이다. 1923년 12월 서태석이 중심이 되어 암태소작인회가 결성되었고, 지주들에게 소작료 4할을 요구하였다. 이를 거부한 지주 문재철에 대해 소작료 불납 운동을 전개하였다. 암태 농민들은 결연한 투쟁 끝에 소작료 4할을 쟁취했다. 암태도의 승리는 다른 도서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1924년경에는 지도, 1925년경에는 도초도, 자은도, 1927년 매화도, 1928년 하 의도로 이어졌다. 이들 지역 또한 치열한 투쟁 끝에 유의미한 성과를 끌어냈다.
소작쟁의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당시 신문자료나 판결문 등을 통해 파악한 총 인원은 325명에 달하며, 이 중 123명이 구속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이름이 밝혀진 사람을 파악한 것일 뿐이며, 실제로는 섬 주민 대다수가 소작쟁의에 참가했다고 봐야 한다. 구속된 자들은 최대 징역 2년부터 집행유예, 벌금, 면소의 형벌을 선고받았다.

지금까지 소작쟁의는 생존권 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투쟁 대상이 일본인 지주가 아니거나 구호나 강령 등에서 식민지 체제에 대한 저항이 없을 경우는 더욱이 생존권 투쟁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소작쟁의 또한 왜곡된 식민지 지배체제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항일민족운동의 하나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